고도의 역사와 문화의 궁궐 경복궁

[vc_row][vc_column el_class=”postpost”][vc_message icon_fontello=”0″]‘아키텐 포스트’옛 아키텐 회원현 아키텐 회원들이 ‘건축’에 관련해 남긴 글을 모으는 아카이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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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건축에서 우리나라 건축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적 전통에 대하여 분석한다]

600년 고도의 서울안에서 여러 시련들을 꿋꿋이 버텨온 조선의 궁궐은 현재 콘크리트 숲으로 뒤덮힌 도시위에 선조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으로 남겨져 있다. 이 고도의 역사가 묻어 있는 궁궐 중,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에서 한국 전통건축의, 왕이 살았던 최고급 전통 고유의 사상과 문화전통을 분석한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vc_column width=”1/4″][/vc_column][vc_column width=”3/4″ el_class=”postpost”][vc_column_text]

 

 

 

경복궁 개요

 

한양의 중심, 경복궁

 

경복궁은 명실상부 옛 서울의 사대문 안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경복궁에 가면 누가 뭐라하더라도 뒤에는 인왕산과 북악산이 멋들어져 있다. 경복궁 광화문을 지나 팜플렛을 들면 이렇게 써져있다.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백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하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처진 한양의 중심이었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 그러나 국권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계획적으로 훼손되었다. ~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이상의 전각이 헐렸으나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 팜플렛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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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측면사진 [북촌쪽에서 보이는 근정전과 경회루가 위치해 있다.]

 

 

경복궁은 조선의 초대 왕인 태조가 옛 수도였던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왕조의 궁으로 삼고자 지은 계획도시 위의 궁이다. 아무래도 새로운 왕조가 태어나려면 새로운 수도가 필요 했을 것. 따라서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 이라는 뜻의 경복궁으로 이름을 지었다. 다음왕인 정종때 잠시 개경으로 복귀 했지만 다시 태종이 천도함으로써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함께 열었다. 하지만 경복궁은 광화문 앞 해태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불에 타 힘들어 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553년, 1592년 임진왜란. 이후 300년 가까이 버려진 채 있던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쓸쓸하고 힘든 역사를 대변해준다. 왕은 재건하려 하지만 왕권의 약화를 반영하듯 계속 실패해 버려졌고,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도입하면서까지 경복궁을 다시 새웠다. 결국 지금 보여지는 것은 100여년 전 경복궁이긴 하지만, 그당시 쓰러져가는 왕조의 위상을 드높히기 위해서 더욱더 화려하고 막대한 돈을 들였을 터.

 

기록에 따르면 태조때의 경복궁은 390여칸으로 지금보다 작고 소박했지만 1869년에 완성된 경복궁은 7,225칸과 궁 밖 489칸. 총 7714칸 이라고 한다. [일성록, 고종실록]

 

 

하지만 1895년 명성황후 시해참변사건 때문에 폐궁되었고, 이후 일제는 궁궐안 여러 건물들을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철거하기 시작했다.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의 건립 때문에 긍정전 앞 흥례문과 회랑, 유화문, 협생문등을 헐고 경복궁 앞 도로의 각 마져 틀어버렸다. 이후 많은 것을 잃은 뒤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는 헐렸고, 최근에 들어서 제자리(?)를 찾았지만, 여전히 여기저기 팔려 지어졌던 건물들로 뒤덮히거나 헐린 경복궁의 건물들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경복궁의 구성

 

경복궁은 서울의 여타 궁궐과 달리 네모 반 듯 한 편에 속하고 동서남북에 문이 설치 되어 주례고공기의 유교적 배치 질서를 잘 수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안에 경복궁 정문이 광화문부터 시작해서 역대왕들의 어진과 신위를 모셨던 태원전, 왕대비가 거쳐하던 자경전, 왕의 치전인 강녕전, 교태전, 연회를 배풀었던 경회루, 궁속의 궁으로 불리는 건청궁, 집옥재까지 다시금 경복궁의 모습을 되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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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경복궁의 정문이자 국권이 드나드는 왕권의 상징이다]

 

경복궁 입지

 

풍수지리설에 의한 궁궐입지

 

조선시대 풍수지리설은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곧 풍수학이였다. 새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얼마 후 태조는 기가 다했다고 판단된 개경을 버리고 풍수학을 통해 새로운 땅에 수도를 새우려 하였다. 처음 거론된 곳은 계롱산과 남경(한양) 이였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주산 논쟁으로 왕십리의 전설이 남겨진 한양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복궁은 북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남산을 바라보고 청계천이 흐르고 남산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는 등 풍수학적으로 매우 길지(吉地)에 위치 해 있다. 동쪽에 종묘와 서쪽에 사직을 설치해 예전 좌묘우사의 배치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이에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악산과 남쪽에 원구단을 연결하는 남북의 축과, 종묘와 사직을 연결하는 동서 축에 포함된 원형 내부 공간은 조선 왕조에 의해 이뤄진 신성한 공간이다. 한양을 수호하는 진산인 북악산에서 여러 신성시한 제사를 지냈다.[박시익한국의풍수지리와건축’]

 

 

경복궁터의 선정

 

경복궁 터는 예전 고려때부터 윤관을 종종 보냈던 궁궐터였다. 고려말 나라가 기울 때 도참설이 유행했는데, 이때 도선대사가 한양에 도읍을 천도하면 36개국이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다 라고 했으며,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향을 주장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동향을 주장했다. 또한 무학대사는 신라 의명대사의 비기를 인용해서

 

 

 

도읍을 정할 때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대로 하면 그 왕조는 5대를 못 가서 왕위를 찬탈하는 변이 생길 것이고, 이백년안에 전국이 도륙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

 

이라고 했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대로 했고, 풍수지리설 때문인지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사건과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풍수에 관한 이야기는 더 있다. 경복궁 앞 관악산이 불의 형상을 했다고 하여 도성에 재난이 많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경복궁에는 전설의 동물인 해태 [불을 잡아 먹는다고 함]를 유독 많이 세웠다. 하지만 해태로는 역부족이였을까? 경복궁에는 유난히 대 화재가 많이 났다.

경복궁의 입지가 길지인지 흉지인지는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풍수적으로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의 기세가 좌청룡에 비해 특히 강하고, 주산인 북악산의 모양새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논리가 주로 부각된다.

[유일란 주거입지 이론에 관한 풍수지리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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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안의 경복궁

 

한양안 궁들 속의 경복궁

먼저 궁궐의 뜻을 풀어본다. 궁(宮)이 왕과 신하가 함께 정무를 보고 거처하는 곳 이라면, 궐(闕)은 그 궁을 지키는 궁성과 성루와 성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복궁은 광화문, 동,서십자각과 그 전체를 싸고 있는 담이다. 그 안에 근정전처럼 전(殿)이라는 글자를 붙일 수 있는 건물은 오직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안에 가장 높은 건물이다.

조선시대 궁은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경운궁 등 여러 작은 궁들이 존재해왔다. 거기에다 운현궁처럼 대원군이 살던 곳도 궁이라고, 칠궁, 혹은 행궁들도 실질적으로 궁은 아니지만 궁이라 칭해 왔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최고의 법궁은 역시 경복궁이었다.

 

 

거친 돌다듬의 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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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의 거친 돌다듬

근정전의 앞마당인 조정에 깔려 있는 화강암으로 만든 박석은 햇빛의 반사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었다. 아무래도 근정전 위에서 아래로 신하를 바라보는 왕이 눈이 부셔서 신하를 처다보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니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궁에서 이 박석을 다시 깔았는데, 거칠게 다듬어지지 않아 눈이 굉장히 부셨던 기억이 있던 터라 더욱더 이해가 빨리 갔다.

 

해태. 화재를 막는 물의 신수

 

해태(해치)는 예로부터 화재를 막는 물의 신수이자 재앙을 막는 벽사의 상징으로 궁중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해태가 물에 사는 짐승이기에 오행설에 맞추어서 불을 막아주는 여수로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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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해치) [예로부터 화재를 막는 물의 신수, 재앙을 막는 벽사의 상징으로 다양하게 사영되었다.]

 

 

광화문 앞에는 해태 두 마리가 있다. 원래는 광화문 앞 80m에 육조거리에 있어서 왕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이 해태상 앞에서 모든 탈것을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또한 해태는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뿔로 받아 버린다고 한다. 경복궁 까지 걸어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해태에게 검사를 맡기는 듯한 옛 선조들의 재미있는 관습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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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므에 방화수를 담아 화마가 제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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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영제교의 오른쪽에 있는 메롱하는 해태처럼 유쾌하다.

 

근정전의 스케일

 

근정전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경복궁의 제일가는 법전이다. 뜻도 그에 맞게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 라는 어마어마한 의미를 담고 있다. 궁궐 안에서 제일 큰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고,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은 그 크기만 봐도 압도가 되는데, 거기 밑에 낮은 기단 두층을 만들고 건물을 2층으로 쌓았지만 통층이여서 안쪽에서 느끼는 공간감은 매우 깊고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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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일까? 뒤편의 전각들은 그당시 작업하는(?) 사람들의 스케일에 맞게 작고 아담한데 반에 근정전 문은 사람의 크기를 2배정도 압도 한다. 조선시대 후기 역사를 안다면 조선시대 왕의 권위는 서민에 딱 두배 정도 되나보다. 라고 서글프게 느껴진다. 근정전 밑에서 왕을 부르느라 ‘전하’ 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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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업품공진회, 조선박라회때 경복궁 근정전에서 벌어진 사이토총독의 포상식수여식과 훈시하는 장면

 

 

 

자경전의 꽃담무늬

 

꽃담은 집의 벽이나 담에 여러 가지 무늬를 놓아 독특한 치레를 하여 장식한 벽면을 통틀어 부르는 말인데 문헌에는 회면벽, 회벽화장, 화문장, 영롱장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꽃담 무늬는 단순한 장식이나 미적 표현이 아니라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데, 만수무강, 수봉강녕, 벽사, 길상 등의 의미를 지닌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잘 알려진 꽃담인 자경전 서쪽 벽에는 사군자, 모란, 연꽃, 태극무늬 석쇠무늬, 문자무늬 등이 집중적으로 장식 되어 있다.[김현정 경복궁 교태전과 자경전의 꽃다무늬의 상징성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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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굴뚝에 있는 사군자 [좌]무늬와 서쪽 벽에 있는 문자 무늬와 석쇠무늬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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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그려진 문자무늬

 

 

건축의 마감

 

꽃담으로 화려한 마감 이외에는 숨겨진 마감의 모습들이 많다. 이를 태면 ‘막새기와’라는 목부재 끝에 치장하는 기와로 이 것에 연꽃, 당초, 모란, 문자나 명문등으로 장식적인 문양을 새겨 그 전각에 맞게 표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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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무늬로 마감된 막새기와

 

 

집옥재 한켠에 자리잡은 팔각정 밑에는 연꽃이 밑으로 자라 꼭 붓처럼 자리잡고 있으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해주는 철판 또한 쉽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닌 나뭇잎 모양 혹은 다각형, 꽃무늬로 마감 처리를 하였으며, 석재기단에는 기단 위아래로 무늬를 새겨넣고, 벽들 가운데도 위 아래 다른 무늬를 통해 단조롭지 않도록 표현 하였다.

 

 

 

현대와 경복궁

 

서울 한복판의 경복궁

 

경복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울 한양도성 중심에 위치한다. 경복궁의 옛 명성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도심 속 텅 빈 휴식처로써 제공되어졌다. 마치 북촌, 광화문 앞 청계천의 세트 인 것처럼…

예전에는 분명 조선의 모든 건축물들 중에서 경복궁을 압도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이제는 경회루 치미에서 처마끝가지 내려오는 곡선이 어쩌면 주변보다 소박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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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례문에서 광화문을 바라본 야경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는 그 자리는 옛 조선왕조의 혼이 담겨 있을 터. 어디서 본건가 했더니

 

그 외형을 살펴보면 전면 중앙은 조형성이 뛰어난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형태를 본떠 만들었으며, 전면에 보이는 5층탑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을, 동편 3층 건물은 금산사 미륵전을, 왼편의 2층 건물은 화엄사 각황전을 본떠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양식을 재현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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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보이는 국립민속박물관 건물

아 너무 너무 예뻐서 심지어 을씨년 스럽기까지 했던 이것이 전통건축을 그냥 모방해다가 가져다 붙여넣기 한 것이 였다.  언제쯤인가. 건축을 배우기전에도 나는 민속박물관건물이 경복궁에서 제일 가는 건물인 줄 아랐던 적이 있었다. 엉뚱한 곳에 우리는 여전히 경복궁을 몰아 부치고 있지 않은가?

 

글을 마치며.

 

물론 현대에 와서 다시금 경복궁의 모습을 되 찾자는 의미에서 복원을 여기저기서 시도 하고 있다.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또 다시 콘크리트 광화문, 혹은 나온지도 모르는 미륵사지 석탑 복사본 등. 20년 전에는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부숴 버렸다. 조선총독부라는 이름의 흔적은 역사적으로 고통스러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철거라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우리세대는 지금 남산에 옛 일제가 심어놓았던 남산 조선신궁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더 나아간다면, 조선신궁의 존재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어느 누가 남산에 일제 천황에게 신사참배를 했던 신궁이 있었냐고 반문 하지 않을까? 이 건축물이 좋았던 나빴던 간에 우리는 역사를 되돌아 볼 계기가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서, 좀더 무분별한 복원으로 쓰지 못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공간으로 현대에 거짓으로 재공함이 과연 옳은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건축공간론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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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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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3 at 오후 6:32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저는 글을 쓸수없네욥 ㅠㅠ..

2016.03.14 at 오전 12:21
– In reply to: Dong-Yeun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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