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건축적 전통 표현에 대한 고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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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구현 방식과 비교

남북한이 한민족의 전통성을 통치이념에 접목시킴으로 지어진 건축이 각국의 수도에서 여전히 전통이라는 상징성을 띄며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짧은 기간동안 분단되어 지어진 건축물을 통해 서로간의 전통에 대한 인식을 시대와 개념, 건축물의 프로그램에 따라 어느정도 비교 분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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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고전형태의 직설적 표현 건축

건축적으로 전통이라는 개념을 고전의 형태적인 측면으로 인식하고 구연한 건축물 중 직설적으로 차용한 대표적 건축사례인 국립민속박물관(1966-강봉진)과 평양대극장(1960-오병헌)을 통해 확인해 본다. 두 건축물 모두 전통의 개념이 최고권력자 주도에 구현되어 설계공모에 의해 당선된 초창기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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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의 모습은 화엄사, 불국사 등의 형태적 모사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직설적이다. 또한 ‘평양대극장’의 ‘조선식 팔작지붕, 용마루와 치미, 조선식으로 유지된 우리식 건물’의 설명[1]을 통해 당시 남북한의 전통적 건축개념의 구현은 아마 고전건축을 통해 찾으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향은 이후 80년대까지 형성되는 국가주도의 공공건축물에 동일하게 보인다. 즉 통치이념이 건축에도 깊게 심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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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을 들여다 보면 재밌는 것이, 이 건축물들의 형태 자체는 고전건축을 차용‘만’ 하고 있음을 단면지붕의 트러스 구조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고전 건축에서의 기단부를 공간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외부의 계단 등은 형태적, 상징적으로만 사용하여 이용 할 수 없다. 즉 3단구성의 지붕, 기둥, 기단의 형태를 그대로 차용 하지만, 실제의 쓰임세는 원래 전통방식의 구조와 다르다는 것이다.

평양대극장도 국립민속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저층부 기단을 확대하여 큰 매스감을 주고 실내 공간으로 사용하였으며, 고층부의 팔작지붕을 다양한 크기와 높이로 중첩시킴으로 높고 큰 규모 집합형태를 가지지만, 저층의 난간으로 이루는 큰 띠들이 한 건물로 인식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치미와 두공을 통해 고구려의 고전건축 양식을 차용하여 민족성을 부각시켰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지붕층의 다양한 레이어는 고려시대의 점점 높아지는 기단의 중첩처럼 느껴지고, 위에 여타 건축물 처럼 매우 많은 곳에 사용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집합형태의 모습은 중국의 고건축의 대기단을 응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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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기서도 지붕구조에 있어서는 트러스 구조를 취한 외형적 기와지붕을 하고 있어 이는 남북 서로가 건축 구조적 방식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3단구조의 방식과 건축 구현 모양을 따오는 데에에 치중했으며 이는 전통을 따르는 형식적 표현과 동시에 공간구성과 경제성을 위함이라 생각할 수 있다. [2]

즉 형태적인 측면에서 전통성을 강하게 어필함과 동시에 기능적인 면과 재료의 선택으로 현대적 특성에 맞게 구성하며 적절히 상쇄시킴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옛 건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전통을 이어받은 새로움을 구축하려는 이미지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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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고전의 은유적 표현 건축
이와는 반대로 직설적 표현 방식에서 비교적 온화한 방식으로 표한한 건축물들을 비교 해본다면 남한의 ‘세종문화회관’(1978-엄덕문)과 북한의 ‘4·25 문화회관’(1973-허범도)이 있을것이다. 연면적이 각각 59,960㎡, 82,000㎡, 지상 6층의 규모의 철골, 철근 콘크리트조인 대규모 문화시설들인 이 건축물들은 한국에서는 당시 최대 규모의 문화시설로 자리 잡았다. 세종문화회관은 1972년 ‘문예진흥기반조성사업’으로 수도인 서울을 상징화하는 대형건축물로 1978년에,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최대 규모의 문화시설로 1975년에 지어졌으며, 국빈대접 등의 큰 행사가 치러지는 평양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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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축물들은 대형 열주를 이용하여 기둥과 두공을 강조하였는데, 세종문화회관의 배흘림기둥과 두공, 4·25 문화회관의 각형기둥과 조선식두공형식은 건축의 표현방식에 있어서 구조적 결구방법으로 이용하고, 굉장히 권위적인 모습의 지붕형태의 열주들은 당시 국가 주도의 건축물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가 아니였을까 한다. 또한 앞부분의 언급했던 3단구성의 모습들은 좀더 단순화 됨과 동시에 웅장해졌는데, 기단부는 예전에 공간으로 사용한 것보다는 대지를 이용한 웅장함으로 변하였고, 기둥들은 입구와 결합되어 서양식 신전과 유사해짐을 알 수 있다. 조금더 재미있는 부분은 위 고전의 직설적 표현에서 보았던 많은 지붕들과는 달리 한건물 한지붕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은유적 표현의 지붕은 장차 남한에서는 좀더 (형태적으로) 다양하게 표현, 지붕의 곡선미나 바라보는 형태등 다양한 한국적 맛을 살리는데 주력하였다면 북한에서는 네모의 각진 그 지붕 위에 지붕을 몇 개나 쌓았는지 (마치 석탑을 눌러놓은 듯)로 점차 표현되어 갔다.(이부분은 3-3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4·25 문화회관은 조선건축사에 따르면 “기둥상부의 장식문양을 두고, 서까래와 같은 모양의 보가 처를 받치며 지붕형상과 처마부분에 민족성을 표현하였다.”라고 한다.[3] 북한에서의 민족적 형식이 다른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로파간다 중심’ 이였기 때문에 단순히 기와지붕을 올려 놓았던 소련식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영향에 따른 ‘끊임없이 투쟁하는 인민대중의 시념과 의지’의 상징인 수직선의 강한 모습이 많았지만, 추상적인 지붕과 기둥들은 앞서 얘기했던 직설적 표현과는 사뭇 다르게 접근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집중적 형태는 그 시기 김일성이 ‘친애하는 조선의 과학자, 문학가, 예술가들에게’[4] 라는 서한을 통해 알수 있듯이 예술, 과학분야에서 근로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고 문화적이며 민족적 정서와 현대적 미감에 맞는 형식을 강요하며 만들어진 형태로 보인다. 때문에 여러 채들로 이루어져 작업동선에 영향을 미치는 형태를 군집, 소련식 건축으로의 일체화로 설계 되어진 듯 하다.

세종문화회관은 위의 전통의 개념표현 방식에 전통적 배치개념을 더 넣었는데, 이는 북에서는 수많은 군집이 한기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볼수 없었던 은유적 표현방법중 하나라 생각된다. 세종문화회관 가운데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배치된 건축군은 아마 더 이상 광장이 이념 선전의 장의 기능을 잃고 빈 공간을 전통적으로 재탄생시킨 것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 이공간이 별 의미 없이 통로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이처럼 새로운 재료를 통한 전통적 형태의 표현이 ‘샤프하고 세련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건축가 스스로 허락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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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또한 형태적인 면에서 변형한 것이 크고, 각 건축물들의 장식무늬 문양, 벽화 그리고 를 보면 어쩌면 이 요소들이 최소한의 한국적 정서의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점점 단순화된 전통성 표현은 동구권 사회주의식 건축과의 만남으로 더욱 표현의 약화가 되고, 중국의 비슷한 건축물들과 차이를 느끼기 힘들어 진다. 하지만 적어도 남북한 서로가 건축적 전통성을 이야기 할 때 외형적인 형태를 고전건축에 차용, 치중하면서 내부는 현대식으로 함과 동시에 내·외부의 무늬, 문양 등의 모습으로 덧입힘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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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기념비적 건축

마지막으로 직접적이고 상징성이 뚜렷한 기념비적 건축을 비교해보자. 서울의 평화의 문(1985, 김중업) 과 평양의 개선문(1982, 평양도시설계사업소)은 각 수도에서 현대적이고 민족성 우월성을 고취시키기고자 도시적 맥락에서도  충분히 비교분석 가능한 건축적 대조이다.

평양개선문 자체는 규모면에서 파리 개선문 보다 더 크며 압도적이다. 자세히 보면 지붕의 모양이 앞서 얘기한거와 같이 특이한데, 3단으로 되어 마치 석탑을 연상케 함과 동시에 끝단의 상승은 평화의 문과 마찬가지로 전통지붕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두공과 겹처마는 전통건축의 모양을 현대적으로 깎아 이루었다. 또한 아치 둘레에 있는 70개의 진달래 문양과 10500개의 천연화강석 재료는 뚜렷한 기능없이 건축을 상징, 기념화 하기에 적절하다. 개선문은 김일성의 70세를 맞아 지어졌으며 전후면에 ‘1925’ 와 ‘1945’가 써져있는데, 이는 “1925년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으시고 만경대를 떠나신 해이며 1945년은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에 개선하신 역사적인 해이다.”란 뜻과 함께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새겨져 기념한다. 이러한 기념비적 모습들은 3단구성의 형태와 함께 새겨지면서 이전의 형태적인 전통미의 중요성 보다는 체제의 우월함과 대표성을 형식적 건축을 통해 과시한다고 볼수 있다. 또 개선문이 위치하고 있는 도시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평양개선문은 파리의 개선문처럼 개선을 하고 (도심으로)들어오는, 그리고 이를 상징하고 기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길의 목적성이 아닌 중간 루트인 즉 문의 역할이며 여전히 도시 가운데 사회주의 역사와 인민의 위대한 승리를, 지도자 동지의 우월함을 도시를 지나는 로터리위에서 아직도 부르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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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반대로 평화의 문은 여타 외부로 나가는 길과는 조금씩 빗겨 나가 있다. 오히려 도심에서 새로운 활력소로 지칭되는 이 올림픽 공원으로 가는 목적지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평화의 문은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상징하는 건축물로써 어쩌면 이념의 마지막 승리의 장식품일지도 모른다. 김중업건축가의 (수정된)설계당시 높이가 90m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북한에 대한 확실한 카운터 펀치였을지 모른다. (비록 24m로 축소되었지만). 여기서도 전통건축의 지붕의 형태, 좀더 나아가 지붕의 하늘로 향하는 곡선과 타일이미지는 지붕, 기둥, 기단중에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전통건축의 현대적 표현의 마지막 결정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평화의 문은 빽빽하고 혹은 새로운 도시의 창조의 상징인 강남한복판의 도로에서 시작하고 끝은 드넓은 공원으로 마감한 것일까? 이념싸움의 끝으로 이제 평화의 문은 주변 높은 건축물에 가려져 상징성을 조금씩 잃어 올림픽 공원만을 이야기한다

 

 

4.맺는 말

비록 몇 안 되는 비교를 했지만 어느 쪽의 전통적 표현의 방향이 옳다 그르다, 혹은 전통성을 계승 하는 방법은 이렇다 저렇다 를 확정짓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주장에 따른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건축가든 건축주든 누구보다도 우리 한민족의 전통성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이며, 이에 따른 다양한 결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도 안 되지만, 무작정 비판해서도 안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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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본인을 나까무라로, 중국인을 왕서방으로 표한하듯이, 직설적인 표현방식은 아무래도 제일 쉽고 흔하면서 확실한 전통성 표현방식이다. 그리고 이에 새롭게 사용되는 현대건축 재료를 통해 전통건축의 모습을 빚어왔다. 이는 단기적으로, 오랜기간 외부세력에 의해 잃어버린 민족성과, 체제의 우월성 등을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였고, 이를 정부에서 강력하게 밀어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이 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부족한 부분을 점점 추상적 표현방법을 통해 의미의 분석 및 이용자들에게 전달하게 되면서 다양한 기법으로 한국성을 표현하게 된다. 즉 앞의 연구를 통해 알수 있었던 사실은 남과 북은 한민족이 가지는 건축적미를 형태적인 요소 중 크게는 기단, 기둥, 지붕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작게는 남은 지붕의 곡선미, 북은 3단구성 형식자체에서 이를 표현하게 된다. 이는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무엇을 더 우리 민족의 대표성이라고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따른 이질성이라고 보여진다. 북한은 민족주의적 요소와 동시의 사회공산주의, (이후 주체사상) 이념으로 인민을 한데 묶는 방법으로 사용하여 전통성 부분에서 사회주의 특성이 강한 부분들이 더욱더 부각됨을 볼 수 있었고, 남한은 비교적 국민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요소를 민족주의적 특성만 부각 되어 발전해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전통적 표현모습의 퍼즐들을 볼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한(韓)민족이 한(一)민족이 될 때에 한민족의 건축적 전통성은 지속적 연구를 통해 모두에게 공감가는 과거와 현재의 교집합적 요소와 동시에 (외부의 요소를 수용하는 방식 등의) 보이지 않는 민족성이 가진 방향을 동시에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1] 평양대극장, 「조선건축」, 2009년 3호

[2] 또 다른 예로 중국 조선족 자치주 (옌벤)에서는 , 민족성 특성이 강하게 묻어 있는 연변대학의 여러 건물에서도 전통건축의 형태를 그대로 모사한 체로 새로운 건축 재료로 표현•구현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지리적 특성상 북한과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되나 북한이 고구려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모사했다면, 중국의 조선족 건축에서는 이전의 조선왕조 시대의 형태를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용마루의 끝이 도출됨은 한민족적 느낌보다는 중국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3] 조선건축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3, 2권 p225

[4] 조선의 과학자, 문학가, 예술가들은 새로운 민주주의민족문화 건설의 중대한 력사적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의 고귀한 재부인 민족문화의 전통을 옳게 계승발전시키며 그 토대우에 쏘련의 사회주의문화를 비롯한 외국의 선진문화도 부단히 배우고 섭취하여야 할 것이다. ‘김일성 전집 4권’, 225쪽

 

 

 

 


참고문헌

경복궁 건천궁 복원 연구 – 조규형, 경기대학교, 2005
공민왕대 초기 측근 중심의 개혁정치와 그 한계 – 김승배, 연세대학교, 2001
고구려와 고대 중국의 유물에 나타난 건축요소 비교 연구 – 김진형, 성균관대학교, 2010
대규모 공공청사건축에 적용된 전통건축요소의 표현에 관한 연구 – 성모경, 영남대학교, 2014
북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건축양식 – 이왕기, 목원대학교
남.북한 공공건물에서의 전통성 표현에 대한 비교 연구 – 전종구, 단국대학교, 2003
남·북한 공공건축에 나타난 ‘전통’개념의 표현 경향에 관한 비교 연구 – 한동수, 한양대학교, 2014
연길시 지역특성을 고려한 민족적 건축디자인에 관한 연구 – 박세영, 청주대학교, 2007
한국현대건축의 한국성 개념에 관한 연구 – 김종국, 광주대학교, 1998
조선건축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3
조선건축, 2009년 3호
이왕기(목원대학교 건축도시공학부 교수) ‘북한에서의 건축사연구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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